밭이 많아 얻은 지명, 어전리의 근현대 100년사 1

밭이 많아서 '느랏(늘앗)'이었던 어전리는 어떻게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되었을까

<새 연재 안내>

삼례 마을사 연재를 처음 시작합니다.

<삼례읍지> 편찬에 참여하고 있는 김성식 박사(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특별연구원)가 쓰는 삼례 마을 이야기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는 <어전리>입니다. <어전리> 이야기는 3회에 걸쳐 나누어 싣겠습니다. 

이어서 삼례의 마을 이야기를 재미있게 이어가겠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1. 어전리의 지리적 위치

 

 

어전리 마을이야기는 위 영상지도에서 시작하기로 한다. 위 지도는 삼례의 서부 평야지역을 보여주고 있다. 지도의 맨 하단으로는 만경강이 흐른다. 그 위 하얗게 보이는 곳이 원예농업이 왕성한 해전마을 비닐하우스 지대이다. 도작(稻作)지대임에도 벼농사를 대체해 원예농업이 시행되고 있다. 그 위쪽 지역은 보다시피 격자식으로 경지정리된 해전・어전 평야이다. 붉은 실선으로 표시한 어전리 구역 중심에, 지도상에 ‘어전리’라고 쓰인 글자 바로 위에 ‘원어전’이 자리한다. 어전리 1구이다.

위 영상지도에서 보듯이 해전 일대는 거의 원예지대인 반면에 어전리는 온통 벼농사지대이다. 벼농사에 비해 소득과 부가가치가 훨씬 높은 농업이 원예작물인데, 어전리는 왜 여전히 벼농사를 고수하고 있을까. 두 지역이 모두 ‘농업진흥지역’, 과거 명칭으로 절대농업지대임에도 농경방식은 전적으로 상반된다. 주지하듯이 토질 차이 때문이다. 이 대목은 항목을 달리 해서 후술하겠지만, 해전은 대하천 중하류의 범람으로 형성된 충적평야 속성의 ‘사질양토’이고, 어전은 습지에 기반한 점토(지들땅)지대이기 때문이다.

 

원어전 북쪽으로는 익산시 춘포면 쌍정리와 경계를 이룬다. 어전리의 북쪽 끝단에 ‘신왕’마을(어전2구)이 자리한다. 그러니까 왕궁에서 익산으로 향하는 도로(석암로) 북쪽지대까지 어전리가 형성되어 있다. 신왕은 한마을 내에서 익산시 춘포면과 완주군 삼례읍으로 나뉘어 구획되어 있다. 신왕마을의 전래지명은 ‘소란터’이다. 소란은 ‘솔안’으로써, ‘솔밭 안’(松內洞)에 형성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구릉성 야산조차 드문 해당 지역에 솔밭이 있으니 동네 이름으로 안성맞춤이다.

신왕 마을처럼 한마을 내에서 행정구역이 나뉘는 곳이 또 있는데 ‘신평’마을(어전3구)이다. 신평은 어전리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다. 위 영상지도를 보면 서쪽의 붉은 실선이 산기슭을 타고 구불구불하다. 해당 산이 춘포면 ‘봉개산’(춘포산)이다. 봉개산 주위에는 동서남북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이 중 동쪽에 위치한 큰 마을이 ‘봉개’인데, 동남쪽 기슭 일부에 신평이 봉개와 면해 있다. 행정구역이라는 인위적 구획선을 지우면 그저 한 마을일 뿐이다.

 

어떤 곡절이 있길래 봉개 복판에 삼례땅이 끼어들었을까. 무슨 까닭이기에 행정구역 구획이 이처럼 복잡할까? 어전리 북쪽 지역의 쌍정리와 맞붙은 곳도 구불구불하기는 마찬가지이다.

 

2. 익산천 개수공사와 행정구역 상관성

 

 

일제강점기 만경강 본류 개수공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한 시기가 1926년 이후이다. 만경강 개수공사 1년 전, 먼저 공사를 착수한 곳은 지류인 전주천이었다. 전주천 개수공사는 1923년에 가뭄으로 한해(旱害)가 커 이재민 구제사업 성격으로 긴급하게 시행되었다. 일종의 구휼사업 성격의 토목공사였다.

전주천 개수공사는 1925년 4월에 기공하고, 1926년 3월에 준공한다. 공사내용은 제방 축조, 공작물 건축, 취입구 및 배수통관 공사였는데 전주천 우안(右岸)연장 4,730m(전주군 조촌면 오송리부터 초포면 미산리까지), 전주천 좌안(左岸)연장 6,880m(조촌면 상가리부터 조촌면 고랑리까지)에서 개수공사가 추진되었다. 또 이때 전주 추천교(楸川橋)를 폭 6m, 연장 153m로 교체(可換)하였으며, 각 지점마다 7개소의 취입구 설치와 배수통관 공사를 하였고, 일부 구간은 콘크리트 블록 호안공사(우안 2,568m, 좌안 2,923m)도 하였다.

지류인 익산천도 개수 대상이었다. 구역은 춘포면 입석리 부근에서 화평리를 지나 판문리에 이르는 구간이다. 익산천은 새로운 하천부지를 정해 양안에 본류 제방과 거의 같은 방수제를 축조하여 본류와 직접 합류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익산천의 현재 모습이 이때 형성되었다.

만경강개수공사 문서자료에 의하면 익산천 제방(방수제)공사와 관련하여 1929년에 추가예산을 증액한다. 이로 보아 직전 해인 1928년이나 1929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니 1930년이나 1931년 무렵에 준공했을 것이다. 이때 제방축조 “마답(馬踏)1) 5m, 법면(法面)2)은 내외 모두 2할, 누수 방지를 위한 소단(小段) 1.5~2m로 설치, 계획홍수위보다 1~1.3m 높게” 설계되었다. 누수방지용 소단(小段)을 설치한다는 것은 제방 중간부터 턱을 두어 2단으로 제방을 보강하라는 작업지시이다.

이 공사는 만경강 본류와 마찬가지로 직강화를 기본으로 추진되었다. 기존의 하천이 매우 구불구불한 사행천(蛇行川)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현재의 익산천은 기존의 하천을 기본골격으로 하되 사행되는 구역을 제방 밖으로 잘라내고 물길을 새로 굴착하여 조성하는 등 제방축조와 직강화를 병행한 개수공사를 거친 모습이다.

사정이 이렇다고 할 때, 본래의 익산천은 현재보다 봉개산 가까지 붙어서 흘렀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는 제방이 아예 없거나, 있다고 해도 마을 주변으로만 불완전한 방천(防川) 정도였을 것이다. 이를 ‘인가방천’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기존의 하천은 큰비 올 때마다 마을과 전답에 수해를 입혔고, 상습 침수지역은 늪지대가 되거나 황폐한 채 버려져 있었다.

 

 

익산천 개수공사는 끝났지만 행정구역은 재조정되지 않았다. 신제방 이전에 어전리가 신제방 이후에도 그대로 어전리로 남았다. 기존에는 하천 동쪽에 있던 마을이었으나 신제방이 축조되어 하천 서쪽이 되었다. 그렇지만 행정구역은 예전처럼 어전리로 남았다. 만경강이나 동진강도 직강화 공사를 거쳤다. 동진강에 가면 제방을 사이에 두고 부안군 지역임에도 김제시 주소가 있고, 반대로 김제시 지역임에도 부안군 주소가 남아 있다. 만경강 주변의 익산시와 김제시 사이에서도 이러한 지역을 찾을 수 있다.

한편 신제방이 직선으로 끊음으로써 제방 밖으로 밀려난 기존의 하천부지는 논밭으로 개간되거나 가옥이 들어서면서 새로운 취락지가 되었다. 논밭으로 개간된 곳은 하천부지이고 국가땅이기 때문에 개인 등기를 낼 수 없다. 하천사용료(점용료)를 매년 납부하고 경작을 할 뿐이었다. 취락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에서 특별조치로 이 부지를 개인 불하하지 않은 한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하천이 육지화되어 이곳에 새로운 마을이 형성되었다. 어전리 신평(新坪. 봉개)이 그러하다. 동네 지명처럼 새로운 터에 새로 생긴 마을이어서 ‘신평’이 된 것이다.

 

 

3. ‘어전’(於田)의 지명유래

 

모든 사물은 하나 이상의 명칭을 갖는다. 사람의 거주지나 지형, 지물도 각각 이름이 있다. 어떤 사물의 이름이 하나만 존재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두 개 이상의 명칭을 가지고 있다. 하나의 대상에 두 개 이상의 어휘가 있을 때 이 둘은 유의관계에 있기 마련이다. 자연물의 이름이나 특정 지역의 이름도 2개 이상으로 명명되어 쓰이는 경우, 이들도 유의관계에 있는 것이다. ‘대전(大田)’ 과 ‘한밭[大田]’은 한 지역의 서로 다른 이름이지만, 우리는 이 둘이 무의미하게 명명되지 않고 언어로서 의미적 연관성을 부여하여 명명되었음을 알고 있다.

우리 생활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지명은 전부요소(前部要素)와 후부요소(後部要素)가 결합한 복합어라 할 수 있다. 어떤 지명 ‘밤실’에 대한 다른 이름으로 ‘율곡(栗谷)’이 있을 때, 이 두 지명의 의미적 유연성을 따져 동일 지역을 지시하는 지명임을 확인하기도 하고, 또 지명 명명 또는 형성의 유래를 살필 수도 있다. 지명어가 복합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들은 각각 ‘밤+실’, ‘율(栗)+곡(谷)’으로 분석할 수 있고, ‘밤’과 ‘율(栗)’을 통해 이들이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고, ‘실’과 ‘곡(谷)’도 서로 관련됨을 알 수 있다. 주위에 ‘밤나무’가 많이 있으므로 이와 관련하여 고유어와 한자어로 표기되었음 알 수 있고, ‘실’과 ‘곡’의 대응을 통해 ‘골짜기’에 위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밤’과 ‘율(栗)’은 전부요소, ‘실’과‘곡’은 후부요소로 파악된다. 전부요소에서 지명의 명명 동기, 생성 유래를 알 수 있고, 후부요소에서 지명의 유형, 즉 마을, 골, 산, 강, 바위 등을 알 수 있다.3)

만경강 본류는 소양천과 전주천이 합류한 삼례부터 시작한다. 이 구간을 삼례 사람들은 ‘한내’라고 부른다. 그래서 만경강을 건너는 다리도 ‘한내다리’이고, 한내다리에 있는 보(洑)도 ‘한내보’로 불렀다. 이 하천과 합류하기 전까지는 ‘고산천’이라고 하여 굳이 명칭을 달리하였다. 두 개의 제법 큰 하천이 합류하는 삼례부터는 강의 몸집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곳부터는 강이 물리적으로 달라졌기 그 인식을 담아낼 새로운 명칭이 필요했다. 그 인식을 투사(投射)하고 또 상류지역과 구별하기 위해서 찾아낸 명칭이 곧 ‘한내’이다. 앞의 ‘대전(大田)’과 ‘한밭[大田]’의 의미적 연관성처럼, ‘한내’는 ‘大川’이라는 삼례 사람들의 인식에 의해 명명된 지명이 된다.

 

‘어전(於田)’에서 ‘於’는 무슨 뜻을 담고 있을까. 이에 대한 지명 명명 정보를 알아보자. 어전의 본 이름은 ‘느랏’(늘앗)이다. ‘어전(於田)’이라는 지명은 앞에서 언급한 ‘밤실’ 혹은 ‘율곡’만큼이나 적잖이 분포한다. 그만큼 특정 의미적 정보를 담고 있다는 뜻이다. 완주군에서는 삼례읍 외에도 이서면 금평리에 ‘어전’마을이 있다. 전주권 쓰레기소각장 건설로 지금은 해체된 마을이다. 이 마을의 속명이 ‘느랏골’이다. 몇 곳의 사례만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느랏[於田] : 충남 공주시 이인면 만수리(넓은 밭이 많음)

느랏[於田] : 충남 보령군 대천면 명천리(밭이 많음)

늘밭(於田) : 전남 나주시 남평면 평산리(메마른 땅이 많았음)

於田[널밭] : 경남 양산군 정관면 병산(뒤쪽에 넓은 밭이 있음)

어전리(於田里) : 경남 합천군 삼가면(넓은 밭으로 되었으므로 널밭이라 함)

 

위의 지명과 관련된 정보에 주목해야 한다. 이 정보들은 지명 명명에 일관되게 ‘넓음’ 또는 ‘많음’의 내용이 공통적으로 담겨 있음을 알려 준다. ‘넓음 또는 많음’은 지명의 명명 동기를 말해주는 전부(前部)요소 ‘於-’와 ‘늘-’에 대응하는 것이다. 이는 지명의 전부요소의 의미가 ‘넒다, 많다’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뜻하므로 지명의 ‘늘-’이 ‘넓다, 많다’의 의미임을 알 수 있다.4)

‘於’는 사전적으로 ‘늘 어’, ‘어조사 어’로 훈독(訓讀)한다. 즉 ‘於’의 뜻이 ‘늘’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늘’은 ‘많다’ 혹은 ‘넓다’의 뜻이라고 했는데, 이는 언어학자들이 15세기 중세언어를 통해서 도출한 귀결로서, 해당 설명은 지면 관계상 약하기로 한다.

그런데 어전리의 현재 모습만 본 사람이라면 위의 지명 설명에 고개를 가로저을 수 있다. 밭이 안 보이기 때문이다. 있다 해도 텃밭 정도에 불과하다. 지명으로 볼 때 과거에는 이 지역이 구릉성 산지였고, 밭이 주조를 이룬 전작지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지대에 물 사정이 나아지거나 수리기술을 터득함으로써 밭에 물을 대면 논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일제시기부터 이곳은 끊임없이 경작 가능한 농지로 개간되어왔을 것이다. 이후 경지정리 과정을 거치면서 완벽한 도작지대에 이르게 되었다. 마치 땅의 호적[地紋]처럼 ‘지명’이 인멸되지 않고 끝까지 남았기에, 우리는 이 땅에 켜켜이 쌓인 지문(地紋)을 한 꺼풀이나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주석>

1) 마답(馬踏)은 제방 상부 수평 부분으로 도로의 일부가 됨.

2) 법면(法面)은 제방, 호안, 절토(切土) 등의 경사면을 말함.

3) 황금연, 「지명어의 전부(前部)요소 ‘크다[大]’ 계열의 고찰」, 『지명학』19호(한국지명학회, 2013, 190~191쪽)

4) 황금연, 앞의 논문, 272쪽.

 

김성식 박사(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 특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