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남권총의거" 주역, 삼례 출신 독립운동가 김춘배 의사

※ 이 글은 지난 2021년 12월 7일 "삼례의 잊혀진 독립운동가 김춘배 의사" 포럼에서 황수근 평택문화원 학예연구사가 발표한 <김춘배의 함남권총의거>를 전재한 것입니다.  김춘배 의사의 손자 김경근 목사는 이제껏 국가보훈처의 기록을 따랐으나 새로 찾은 제적등본에 따라 김춘배가 삼례출신임을 증명하였으며 생몰연월일이 1906년 2월 29일~1942년 7월 8일이라고 정정하여 밝혔다.  

 

머리말

 

김춘배(金春培)는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 출신으로 유년 시절 간도로 이주 후에 1927년 정의부 의용군으로 간도일대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으며 1934년에는 함남권총의거를 실행한 인물이다. 전북 전주군 삼례면 삼례리(현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에서 태어난 김춘배는 기독교계열의 영신학교에서 근대교육을 받았으며, 일제의 횡포와 착취를 피해 가족과 함께 간도로 이주하였다. 간도에서 정의부에 가담하여 당시 인근 부호에게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으며, 이로 인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청진형무소에서 탈출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김춘배는 1934년 출옥 후에 단독으로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주재소에서 총기와 실탄을 탈취했으며, 이 총기를 사용해서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했다. 도주 중에 일경과 대치하여 교전하였으며, 목하(木下) 순사부장(巡査副長)에게는 중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그를 잡기 위해 경찰, 재향군인, 소방조원 등 560명 내지 1,000명이 동원되어 19일간 연인원 2만 명이 넘었으며, 지문의 권위자인 경기도 형사과의 二見경부도 현장에 파견되어 감식하였다.

 

이 사건은 일제에 의하여 ‘함남권총사건’ 혹은 ‘북청권총사건’, ‘신창권총사건’으로 불리며, 김춘배가 잡히자 보도해금이 풀려 1934년 10월 22~23일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에서 일제히 호외를 내보냈다. 특히 『조선중앙일보』에서는 1934년 10월 23일부터 29일까지 ‘북청권총사건의 진상’이라는 제목으로 총 7회에 걸쳐 연재보도를 하였으며, 이후 공판 상황에 대해서도 다수언론에서 지속적으로 보도하였다. 이외에도 『경성일보』, 『부산일보』 등 지역신문에서도 김춘배의 함남권총의거가 소개되었을 만큼 전국적으로 주목받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경찰국의 기관잡지인 『경무휘보』에서는 1934년 11월(제343호)부터 1935년 1월(제345호)까지 3차례의 걸쳐 「괴도 김춘배」로 연재되었다.

이처럼 함남권총의거는 당시 다수의 언론에 주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단신으로 주재소를 습격한 1934년 국내항일운동 중 대표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학계에서는 김춘배의 의거 활동에 대하여 주목하지 못하였다. 이에 본고에서는 김춘배의 인물과 군자금 모금 활동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1930년대 군자금 모금을 밝히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Ⅰ. 김춘배의 출생과 간도 이주

 

1. 김춘배의 가계

 

김춘배는 집안은 5~6대를 전라북도 전주군 삼례면 삼례리(현 완주군 삼례읍 삼례리)에서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일보』 1934년 10월 25일자 기사에 따르면, 그의 집안이 삼례에서 세거하며 비교적 윤택한 삶을 영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집안이 세거한 삼례는 만경강 본류와 인접해 있으면서 평야가 많아 경지율이 높으며, 논·밭의 구성비에 있어서 논의 비율이 매우 높은 곳이다. 그리고 예부터 교통의 요충지로 조선시대의 교통제도인 역원제에서 삼례역은 전라도의 중요역이었으며, 조선후기부터 발달된 삼례시장은 일제강점기에도 지속적으로 운영되었다. 이러한 삼례는 비옥한 농토와 교통의 요충지로서 전라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세거한 김춘배 집안은 김해김씨 호참공파로 조부 김헌식은 한학을 수학하였고, 아버지 김창언은 오형제 중 둘째로 삼례시장에서 포목상을 운영했고, 아버지의 형제들 중 첫째 김계홍은 삼례교회 초대 장로를 지냈다. 김춘배의 형인 김성배는 이후 목사로 활동하였다.

이곳에 세거한 김춘배의 집안은 앞의 기사에서처럼 그의 아버지인 김창언의 형제들은 삼례에서 초기 기독교인으로 활동한다. 김계홍은 1905년에 설립된 삼례교회의 창립 교인으로 1911년 삼례교회의 초대장로에 추대될 정도로 열렬한 기독교인으로 활동했다.

삼례교회는 영신학교를 세워 삼례에 근대교육을 전파하였다. 영신학교의 전신은 영흥학교로 삼례 지방에 최초로 설립된 근대식 학교이었기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와서 수학하였다. 교사는 전주 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의 고등과 출신으로 구성되었으며, 1917년에는 교명을 영신학교로 바꾸었다. 영신학교에서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고등한신편, 찬송가를 포함한 7교과를 가르쳤다.

이처럼 김춘배 집안은 삼례에서 여러 대를 걸쳐 비교적 윤택한 삶을 살았으며, 삼례가 교통의 요충지이라는 점과 아버지 김창언이 상업에 종사하였다는 점이 기독교에 접근이 용이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 출생과 간도에서의 군자금 모금 활동

 

김춘배는 1904년 2월 29일 김창언의 차남으로 태어나 간도로 이주하기 전까지는 삼례에서 살며 영신학교에서 4학년까지 다녔다. 가족들의 기독교 생활을 통하여 알 수 있듯이 김춘배는 유년기 시절부터 기독교를 접하고 생활하는 환경에서 성장하였고 이를 통해 근대적 교육을 배웠다.

삼례에서 비교적 윤택한 삶을 살던 그가 영신학교 4학년을 다닌던 중 1917년 가족 모두가 간도로 이주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 1934년 10월 25일 『조선일보』기사를 보면 소작을 빼앗기는 등 일제에 대한 반발감이 생겨 간도로 이주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완주 지방에서 일본인 소유 농장으로 유명하였던 것은 조촌면 반월리의 전북농장(全北農場), 삼례면 삼례리의 이등농장(伊藤農場), 삼례면 후정리의 이엽사농장(二葉社農場), 축축농원(筑築農園), 구보전산업주식회사농장(久保田産業株式會社農場) 등이 있었다.

이중 이등농장은 전라북도 삼례를 중심으로 전주, 익산, 김제 등지에서 대규모의 농장을 운영하였다. 이 농장은 1906년 4월에 삼례면 신금리와 석전리 소재의 논 400여 두락과 밭 80여 두락을 매수하여 이등농장을 설립하고 농장사무소 위치는 삼례면 삼례리였다.

1934년에 이등농장에 속해 있었던 소작인의 수는 1,133명이었다. 이들은 주로 삼례면과 봉동면에서 소작활동을 하였으며, 1인당 논은 약 1,100평, 밭은 900평, 대지는 170평의 농지를 소작하였다. 이들이 1인당 납부한 소작료는 4.05石인데, 이는 당시 전라북도 평균 소작료 4.50石과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전국평균이 3.20石임을 감안할 때 이등농장에서 수취한 소작료는 높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처럼 삼례 일대에는 일본인 농장이 확대되었고 그러한 과정에서 김창언이 소작하던 논의 소작권도 빼앗긴 것으로 보인다. 일제의 횡포로 인해 소작을 못 하게 되자 이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된 부친 김창언과 오형제들은 간도로 이주하였다. 김춘배 역시 이로 인해 일제에 대한 반일의식이 싹텄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주한 곳은 북간도 연길현 상의향 광암동으로 이곳은 교회 목사가 간도를 시찰했다는 점과 상의향의 장로회 교회가 있었고, 김춘배의 형인 김성배가 인근 기독교계 명동 중학교에 편입했다는 것을 볼 때 기독교 영향을 받은 지역일 것이다.

김춘배는 가족들과 함께 이주하여 살면서 광명학교 4학년에 중도퇴학하고 아버지를 따라 포목상을 하다가 형 김성배가 국민회 활동을 하였고, 『부산일보』에 따르면 국민회 간부로부터 민족적 사상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한 점을 보았다. 당시 연길지역에서 활동하던 국민회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이 고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927년 2월 옹성나자에서 안동현의 오희영의 소개로 정의부에 가입하게 된다. 오희영으로부터 권총과 탄환을 건네받고 북간도 연길현을 기점으로 활동하였으며, 인근의 부호를 습격해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이는 1928년 1월 31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김춘배는 상의향 동리사람인 계형진을 비롯해 김승무와 함께 조선독립에 목적을 두고 간도 일대에서 정의부 모연대로 군자금 모금을 하였다.

정의부 의용군의 간도 내 무장투쟁은 모험대 또는 암살대라는 명칭의 전투부대와 의무금 징수와 군자금 모금을 목적으로 한 모연대, 그리고 지방의 안위를 위한 자위대 성격의 보안대 등이 편성되어 전개되었다.

정의부에 협조하지 않고 외형적으로는 부민행세를 하면서도 언제든지 친일을 할 수 있고 정의부의 의무사항을 지키는 데 소홀한 이들이 모여 있는 지역에 모연대를 조직하여 파견하였다. 파견된 모연대는 그 지역에서 항일의식이 투철하고 정의부 본부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인물들의 도움을 받았다.

김춘배는 본부에서 파견된 모연대가 아닌 지역에서 항일의식이 투철한 인물로 정의부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금을 실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의 주요활동 지역이 본인 거주지와 그 인근이었며, 1927년 2월에 가입하여 그해 4월에 군자금 모금을 시작한 2개월은 정의부 의용군에게 필요한 일정기간의 군사학교의 수학기간인 1년보다 짧은 기간이기 때문이다.

정의부 의용군은 1926년 1월 군민대표회가 결정되고 난 후 무장활동이 강화되면서부터는 국내진입전과 만주 내의 일제기관 파괴 등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1927년은 이러한 정의부의 무장활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기로 이때 김춘배가 의용군으로 참가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정의부의 군자금 모금활동 경험이 이후 함남권총의거를 실행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정의부 군자금 모집으로 인해 김춘배는 그해 12월 광산으로 유명한 천보산분서 간도총영사관경찰에 잡혀 청진지방법원에서 6년 징역을 언도를 받았다.

김춘배는 청진형무소에서 복역 중인 1928년 6월 29일 오전 11시에 청진감옥 노역장에서 일을 하다가 칼 한 개를 숨기고 3일 후인 7월 2일 오전 2시에 탈옥하였다. 이후 그해 7월 14일에 함경북도 회령 창두주재소에서 잡혀 징역이 추가되어 7년 4개월의 중형을 지게 되었다. 이후 경성형무소로 옮겨졌다가 1934년 5월 4일 함흥에서 출옥하여 형의 집이 위치한 함경남도 신창으로 갔다.

 

Ⅱ. 김춘배의 함남권총의거

 

1. 함남권총의거의 계획 수립

 

김춘배는 복역 중에 공산주의사상을 수용하게 된다.  『조선중앙일보』  1934년 11월 21일 기사에 나타난 재판장 취조하는 모습에서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복역 중인 김근으로부터 공산주의사상을 받아들인 김춘배는 출옥한 뒤 그의 형이 살고 있는 함경남도 신창으로 가서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게 된다.

출옥하자 그는 수감 중에 배운 재봉일을 하기 위해 형의 소개로 장로교회 집사인 김윤식의 양복점에서 일하였다. 이때 그는 주변에서 공산주의사상에 대해 이야기 한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  1934년 10월 22일 호외  「공산당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아내와 형에게 공산주의사상을 이야기 한 것으로 보이며, 아내에게는 입당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또한 가족뿐 아니라 본인이 일하고 있는 양복점 주인에게도 입당을 권유하는 등 주변에 공산주의사상을 퍼트리고 입당을 권유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춘배가 공산주의사상을 수용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깊이 있는 이해보다 기본적인 내용만 인식하고 민족적인 개념에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공산당에 입당하지도 않은 것으로 보인다. 공산주의 사상에 대한 기대는 가졌지만 실질적으로 입당하지는 않은 상태였으며 의거 이후에 간도로 넘어가 입당하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모은 자금은 만주로 건너가 그곳에 있는 빈민을 규합하는 동시에 공산주의 부락을 만들려고 한 것이다.

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김춘배는 군자금을 모금하는 계획을 하게 된다. 신창에서 그의 의견을 동조하는 이들에게 국외로 나가서 민족운동을 일으키자고 제안하였지만 거절당하였고, 이로 인해 김춘배는 단독으로 의거를 실행하기로 한다. 처음에는 마취제를 제조하여 군자금 모금을 실행하려고 했다. 『동아일보』 1934년 10월 23일 기사에 따르면, 표백분과 알콜 등을 통해 마취제를 만들어 보려고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군자금 모금을 위해 총기를 사용해 의거를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김춘배는 경성형무소에서 복역 중 우연히 같은 방에서 지낸 김선학을 통해 주재소의 총기탈취사건을 매우 유심히 들었다고 한다. 김춘배 역시 정의부원으로 활동할 당시 권총을 사용하여 군자금을 모금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총기 사용이 용이했을 것이다.

당시 신창주재소의 형태도 습격하기 매우 용이한 구조였다. 동쪽으로 경사가 진 산중턱에서 항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었는데, 부식되어 기울어진 가옥에, 서쪽의 토담은 안쪽이 7척 높이였고, 도로를 따라 바깥쪽으로는 불과 3척이라서 지나다니면서 주재소 안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결점이 있었다. 들어가기는 편했지만 나가기는 어려웠다. 또한 신창주재소는 직원의 숙소가 사무실 앞에 있긴 했지만 주재소 안에 따로 숙직실을 두지 않았다. 신창주재소의 침입이 쉬운 구조와 야간에는 비교적 방범이 허술한 점은 김춘배가 무기를 탈취하기 위한 장소로 선택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2. 함남권총의거의 경과

 

김춘배는 1934년 10월 2일 김춘배가 신창주재소에서 무기를 훔치고 19일 동안 도주하다가 22일 신창역 경성발 열차에서 잡히게 되었다. 이러한 함남권총의거의 경과를 살펴보면 신문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체적으로 일시장소에 대해서는 동일하다. 이를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재구성해보면 다음의 표와 같다.

 

<표> 함남권총의거의 경과

일시

장소

내용

10월 2일 오후 9시

신창주재소

순사 하나가 있어 되돌아 옴

2일 밤 12시

신창주재소

무기를 훔친 뒤 예배당에 장총과 장총실탄을 숨기고 집으로 귀가함

3일 오전 8시

신창주재소

청소하러 주재소에 들어간 청소부에 의해 탈취 사실 발각

4일 오후 10시

양화면 후호리

후호리어업조합

조합 숙직원 현종관을 권총으로 협박하고 현급 90원을 강탈하여 가지고 호만포리방면으로 도주

6일 오후

신호리 신포면장의 집 앞

김춘배가 지나가는 것을 면장의 딸이 발견하고 경찰에 급보

7일 오전 4시 20분

신포면 부창리

불심심문에 권총을 꺼내어 2발을 발사하고 후창면 오평리 산곡으로 도주

8일 밤 12시

속후면산길

길목을 지키는 경관과 서로 교화 후 도주

10일 새벽 2시

의호리

경관에게 발각되어 권총을 발사하여 북촌경찰서 金允鉉 순사의 오른다리를 맞춰 중상을 입히고 도주

10일 오후 4시

후창면 당우리

區長이 범인을 잡으려고 했으나 범인은 즉시 권총으로 위협 후 도주

당우리 목고개 마루턱

6명의 자경단원들이 모인 곳에 나타나 식사를 해결하고 도주

10일 오후 5시

평산면 덕전리

출현 후 도주

12일 새벽 1시

신창

예배당에 장총을 숨겨두었던 곳으로 가서 뒤져 본 후 그길로 자기가 살던 집으로 그 아내를 만나러 들어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감.

13일 새벽 2시

거산면 하세동

강구경부보(江口警部補) 이하 5명의 수사대가 그 동리 산을 포위하고 추격, 교화하여 목하순사부장(木下巡査部長)의 어깨와 갈빗대에 명중 후 도주

20일 오전 8시  45분

신창역 출발

경성행열차

신창역에서 기차를 통해 이동하려다가 붙잡히게 된다.

 

김춘배는 신창주재소에서 무기 장총 6정(38식) 기병총 5정, 보병총 1정, 26식 권총 2정과 기병총실탄 6백 발, 권총실탄 1백 발을 훔친 뒤 무기가 많아 기동하기 어려워 권총을 소지하고 장총은 예배당에 숨겼다.

이후 김춘배는 22일 신창역에서 잡힐 때까지 북청군 일대를 19일 동안 도주하였다. 10월 2일부터 13일까지 수차례 출현하여 순사부장에게 중상을 입히는 등 경찰과 대치하고 교전하였다.

13일 이후 한동안 종적이 묘연하던 김춘배는 산골에 들어가서 숨어 있었다. 18일 밤에는 연대사에 들어가서 주지에게 약을 사오라고 하여 다친 곳을 치료하고 배를 불린 후 20일 오전에는 경비가 철회된 것으로 짐작하고 신창역을 향하였다.

20일 신창역에서 기차를 통해 이동하려다가 붙잡히게 된다. 이렇게 19일 동안의 도주 생활을 한 김춘배는 신창역에서 출발하는 경성행 열차에서 붙잡혔다. 주거침입, 절도, 강도 등 죄명으로 함흥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 언도를 받고 12월 초 불복공소하여 경성복심법원에 회부되었지만 공소를 취하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무기징역을 복역하게 되었다. 해방 후에 출소하여 이듬해인 1946년 사망하였다. 이후 1990년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III. 함남권총의거의 역사적 성격

 

함남권총의거는 김춘배가 체포되자 보도가 해금되어 『매일신보』, 『동아일보』, 『조선 일보』, 『조선중앙일보』 등 주요일간지에서는 일제히 호외를 내며 보도하였다. 각각의 헤드라인을 살펴보면 『매일신보』에서는 '관북천지용동 시킨 신창총기대도난사건, 『동아일보」에서는 '근래희유의 함남권총사건', 『조선일보』에서는 '경관과 충돌교화전 후사오차 신창주재소무기 대량도난사건, 『조선중앙일보』에서는 '함남일대에 동출서몰 하든 권총범 김상배 마츰내 피착'이라고 나오는 등 당시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이다.

이는 이후 공판에 많은 방청객들이 몰린 것을 보면 많은 관심이 있는 사건이었다. 이처럼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은 함남권총의거가 다른 군자금 모금과의 차이점은 어떠한 조직에 속하지 않고 단독으로 의거를 행했다는 것이다. 김춘배는 함께한 공모자는 없고 단독행동이라는 것을 시인하였으며 이 의거로 인해 처벌받은 사람을 보면 숙식을 도와주고 고발하지 않은 3명은 서류만 송치되었고 상처를 치료해 준 연대사 주지 최응룡 만이 취조를 받고 공판을 받았으나 벌금 50원으로 처벌수위가 낮았다. 이러한 점을 볼 때 이들은 김춘배와 함께 의거를 일으킨 공모자로 보기 힘들다.

자칫 이러한 의거를 행위자체만 보았을 때 일반 강도 사건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김춘배는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군자금 삼만 원을 모금한 뒤 만주로 넘어가 공산촌을 건립한다는 확실한 의도를 가지고 의거를 행했기에 일반 강도사건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무기를 탈취한 것은 자금조달과 더불어 이후 만주에서 넘어가 부하를 모아 활동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소비에트 공산주의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했지만 그의 마음은 민족주의의 경향이 강했다. 신창에서는 그의 사상에 동감하는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국외로 나가 민족운동을 일으키자고 선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의거를 혼자서라도 거행한 이유를 그의 어릴 때 마을사람과 영신학교 교장과의 인터뷰한 기사를 보면 이처럼 김춘배는 어릴 때부터 강직하고 생각한 것을 바로 행동으로 실행하는 성향이 있었으며 이러한 성향이 단독으로 의거를 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함남권총의거는 당시 주목도가 높은 사건으로 어떠한 조직에 속하지 않고 김춘배가 단독으로 실행했던 의거이다. 단독행위 이기 때문에 일반 강도 사건으로도 볼 수도 있지만 김춘배는 이 의거를 실행하기 위한 의지와 목표가 있었다. 이처럼 함남권총의거는 어떠한 조직에 속하지 않고 개인이 단독으로 일제에 저항하여 의거를 시행한 사례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맺음말

 

지금까지 간도와 국내를 오가며 활동한 김춘배의 군자금 모금 활동을 살펴보았다. 김춘배는 1904년 2월 29일 전북 전주군 삼례면 삼례리에서 김창언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기독교학교인 영신학교를 4학년을 다니다 일제의 횡포의 의해 1917년 일가 모두가 간도 상의향 광암동로 이주하였다. 그곳에서 광명 학교에 통학하다가 4학년에 퇴학하여 아버지를 따라 포목상을 하다가 1927년 2월 옹성라자에서 정의부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연길 일대를 돌아다니며 근처 부호 6호를 협박하는 등 독립운동자금을 모집하였다. 천보산분서에 체포되어 강도 사기범으로 6년 4월의 중역을 받고 청진형무소에서 복역 하였다. 복역 중 탈옥하여 형이 추가되고 경성형무소로 이감되어 복역을 하고 1934년 5월 12일에 만기 출옥하였다. 복역 중 재소자들로부터 공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출옥 후 함남 북청 신창의 양복점에서 그 아내 김명숙과 함께 양복 직공으로 고용이 되어 일하였다. 부호에게 협박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로 건너가서 공산촌락을 건설할 작정으로 1934년 10월 2일 단신으로 신창주재소의 총기 및 실탄을 탈취하였다. 이후 19일 동안 수색하였지만 잡지 못하였으며 신창역을 습격하여 기차를 타고 서울로 남하하다가 22일 아침에 잡혔다. 그동안 북청어업조합을 습격하여 군자금을 마련하였으며, 포위망을 피해 일본 순사부장을 비롯한 경관 2명에게 총상을 입히기도 하였다. 잡히기 전 19일 동안 동원된 경찰과 자경단원이 2만이었다. 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해방 후 출옥하게 되었지만 이듬해 12월 사망하였다.

이렇듯 김춘배는 일제의 횡포를 피해 간도로 이주하였으며, 직접행동을 통한 민족 운동을 실행하였다. 간도에서는 정의부원으로 군자금을 모집의 최전선에서 활동하였고, 국내항일운동에서는 함경남도에서 단독으로 의거를 실행한 점은 1930년대 군자금 모금 활동의 한 사례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황수근

(평택문화원 학예연구사)